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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6일 (일) 05:50 판

동안도 반환
同安島 返還 | 둥안도 본한
Handover of Duan
포광시에서 열린 동안도 반환 기념식
일시 1972년 10월 13일
(+19447일, 53주년)
장소 동안 미국 민정청
원인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10월 유신의 계획
리처드 닉슨의 집권 (닉슨 독트린)
결과 대한민국닉슨 쇼크 극복[1]
동안청 성립
서명자
 미국
 대한민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박정희
고등판무관
어니스트 F. 록펠러

개요

1972년 10월 17일 동안도와 부속도서의 시정권이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옮겨간 사건. 이 일로 동안 미국 민정청은 해체되었으며, 일종의 후신으로 동안청이 설립되었다. 이 일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에서 얻어낸 땅을 대부분 내려놓게 되었다.

오키나와와는 달리 동안도는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얻어내었을 뿐 실제로 통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복귀, 회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반환'이라는 명칭도 어색할 수 있지만 미국이 정전 협정 당시 항복한 동안인민공화국 영토를 한국이 가지되 신탁통치를 통해 시정권을 미국이 갖는 식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합병이나 할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말미 소련일본 제국 치하의 만주에 이어 동안도를 공격하면서 전후 잠시 소군정이 성립하게 되었으며, 2년도 안 된 1947년 4월 7일 일찍 떨어져 나온 후 신성일 등의 주도로 동안인민공화국 독자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6월 29일 북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고, 영남 쪽으로 전선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요충지로서 작용하여 강릉, 춘천, 울진, 영덕, 포항 등에 공세를 가했다. 그러나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판도는 역전되게 되었고 UN군이 북진을 개시한 10월 9일로부터 4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1년 2월 5일 청광이 함락, 그로부터 1달 뒤인 3월 30일에 임시수도 백춘까지 함락당하면서 4월 1일 항복하게 된다.

이후 동안인민공화국정전 협정 시까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다가 협정을 통해 미국신탁 통치 후 잠정적으로 대한민국에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임시적으로 시정권이 미국에 귀속되게 된다. 이렇게 성립된 것이 동안 미국 군정청. 이후 1952년 오키나와와 함께 동안 미국 민정청으로 전환된다.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닉슨 독트린을 시행하면서 급성장하고 있던 대한민국동안도 신탁 통치의 종료를 원했고, 동안도민자치회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경제 발전이 더뎌지면서 정치적 지위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유신과 함께 동안도의 반환을 좋은 기회로 보고 유신 직전 동안도를 반환받을 수 있도록 1972년 10월 13일에 발효되도록 하여 1971년 협정에 조인하였다.

오키나와 반환 협정이 조인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협의를 개시, 빠른 속도로 조인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일본에 오키나와가 반환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을 잠재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 결과적으로는 박정희10월 유신이 반민주적임에도 일부에게 지지를 받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동안도에서는 한국의 경제 회복을 빌미로 자신들을 이용한 셈으로, 이후 상진동 참사로 이 일이 재조명되면서 한나라당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