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도 반환
동안도 반환 同安島 返還 | 둥안도 본한Handover of Du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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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광시에서 열린 동안도 반환 기념식 | |||
| 일시 | 1972년 8월 13일 (+19507일, 53주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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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동안 미국 민정청 | ||
| 원인 | |||
|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리처드 닉슨의 집권 (닉슨 독트린) | |||
| 결과 | 대한민국의 닉슨 쇼크 극복[1] 동안청 성립 | ||
| 서명자 | 미국 | 대한민국 | |
| 대통령 리처드 닉슨 |
대통령 박정희 | ||
| 고등판무관 어니스트 F. 록펠러 |
국무총리 김종필 | ||
개요
1972년 10월 17일 동안도와 부속도서의 시정권이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옮겨간 사건. 이 일로 동안 미국 민정청은 해체되었으며, 일종의 후신으로 동안청이 설립되었다. 이 일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에서 얻어낸 땅을 대부분 내려놓게 되었다.
오키나와와는 달리 동안도는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얻어내었을 뿐 실제로 통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복귀, 회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반환'이라는 명칭도 어색할 수 있지만 미국이 정전 협정 당시 항복한 동안인민공화국 영토를 UN군이 임시 행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정해진 뒤 한국 정부와의 협의로 시정권을 임시적으로 미국이 갖는 식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합병이나 할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말미 소련이 일본 제국 치하의 만주에 이어 동안도를 공격하면서 전후 잠시 소군정이 성립하게 되었으며, 2년도 안 된 1947년 4월 7일 일찍 떨어져 나온 후 신성일 등의 주도로 동안인민공화국 독자 정부가 수립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7월 3일 북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고, 영남 쪽으로 전선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요충지로서 소련군의 우회경로로 작용했을 뿐더러 소련 해군의 지원 하 영덕, 포항 등 동해안 지역에 게릴라식으로 침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판도는 역전되게 되었고 UN군이 북진을 개시한 10월 9일로부터 4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1년 2월 5일 청광이 함락, 그로부터 1달 뒤인 3월 30일에 임시수도 백춘까지 함락당하면서 4월 1일 남측에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1951년 초 동안인민공화국이 임시수도 백춘 함락 이후 사실상 붕괴하고 주요 행정 기능이 마비되자, UN군은 해당 지역의 안정화와 피난민 보호, 전쟁 후 정전 협정 이행을 위한 군사적 안전지대 확보를 이유로 동안도 일대를 UN의 임시행정구역으로 설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당시 유엔한국위원단(UNCURK)과 정전협정 준비를 담당하던 UN 측 대표단에 의해 검토되었으며, 1953년 말 UN 총회에서 「동안도 지역의 질서 회복을 위한 UN 신탁통치에 대한 결의」가 가결되면서 공식화되었다. 1953년 12월 18일 채택된 UN 총회 결의는 동안도와 그 부속도서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한다고 규정하면서도, 전쟁 피해 복구 및 치안 안정을 위해 해당 지역을 UN 신탁통치 하에 두고, 미국을 관리국으로 임명한다고 정했다.
당시 UN 결의안은 동안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규정하되, 시정권을 지정된 관리국이 행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미국 측은 소련, 북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동안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호의적이었고, 전쟁 후 행정력과 재정이 부족했음에도 동안도내 치안 공백의 해결과 잔존 공산세력 소탕이 필요했던 대한민국 또한 미합중국을 관리국으로 요청하면서 미합중국이 시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1954년 한국 정부와의 별도 양해각서를 통해 행정·사법·치안 기능의 상당 부분이 미국 고등판무관에게 이양되었다. 이 체제가 이후의 동안 미국 군정청 및 민정청 체제로 이어지며 약 20년 동안 사실상의 단독 관리 체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닉슨 독트린을 시행하였다. 급성장하고 있던 대한민국도 외자 유치의 필요성과 닉슨 쇼크의 극복을 위해 동안도 신탁 통치의 종료를 원했고, 동안도민자치회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경제 발전이 더뎌지면서 정치적 지위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동안도의 반환을 좋은 기회로 보고 1972년 8월 17일에 발효되도록 하여 1971년 협정에 조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