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도 반환
동안도 반환 同安島 返還 | 둥안도 본한Handover of Du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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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광시에서 열린 동안도 반환 기념식 | |||
| 일시 | 1972년 8월 17일 (협정 발효) (+19730일, 54주년) 조인 1971년 9월 22일 | ||
|---|---|---|---|
| 장소 | 동안 미국 민정청 | ||
| 원인 | |||
|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 오키나와 반환 협정 조인 리처드 닉슨의 집권 (닉슨 독트린) | |||
| 결과 | 대한민국의 닉슨 쇼크 극복[1] 동안청 성립 | ||
| 주요 인물 | 국가 | 미국 | 대한민국 |
| 서명 | 국무장관 윌리엄 P. 로저스 |
외무부장관 김용식 | |
| 비준 | 대통령 리처드 닉슨 |
대통령 박정희 | |
개요
1972년 8월 17일 동안도와 부속도서의 시정권이 미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옮겨간 사건. 이 일로 동안 미국 민정청은 해체되었으며, 일종의 후신으로 동안청이 설립되었다. 이 일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 근해에서 얻어낸 시정권 대부분을 내려놓게 되었다.
상세
오키나와와는 달리 동안도는 대한민국이 전쟁에서 얻어내었을 뿐 실제로 통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복귀, 회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반환'이라는 명칭도 어색할 수 있지만, 1951년 동안인민공화국의 항복 이후 UN군이 잠정 행정권을 행사하다가 정전 협정 체결 후 UN 총회 결의를 통해 동안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확인하되 그 시정권만을 미국에 위임하는 형식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합병이나 할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이 협정으로 이전된 것은 영유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정권이다.
한편 이 협정은 인구 1,081만 명, 면적 30,804㎢에 달하는 지역이 한꺼번에 이양된 사례로, 시정권 반환이라는 형식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오키나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반환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는 3할, 인구는 3분의 1가량 늘어났으며, 이는 20세기 후반 한 국가가 전쟁 이외의 방식으로 획득한 영역으로는 손꼽히는 규모였다.
배경
소군정과 동안인민공화국
제2차 세계대전 말미 소련이 일본 제국 치하의 만주에 이어 동안도를 공격하면서 전후 소군정이 성립하게 되었다. 미국은 경해의 요충지가 소련의 단독 관리 하에 놓이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였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논의 끝에 소련은 자신들이 후원하는 정권을 수립한 뒤 철수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4월 7일 신성일 등의 주도로 동안인민공화국 독자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소련군은 같은 해 말 북한 주둔군과 함께 섬에서 철수하였다.
6·25 전쟁과 항복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7월 3일 북측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당시 동안인민공화국의 인구는 1,500만 명 규모로 북한을 웃돌았기 때문에 그 참전은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영남 쪽으로 전선이 구축된 상황에서 소련군의 우회경로로 작용했을 뿐더러 소련 해군의 지원 하 영덕, 포항 등 동해안 지역에 게릴라식으로 침투하기도 했다.
그러나 9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판도는 역전되었고, UN군은 10월 9일 북진을 개시하는 한편 동안도에 대한 해상 봉쇄에 들어갔다. 11월로 예정되어 있던 상륙 작전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상륙 예정 병력이 본토 전선에 급히 차출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사이 동안도는 소련군이 남기고 간 해안포와 기뢰밭, 그리고 섬을 동서로 가르는 산맥에 의지해 고립된 채 버텼다. 다만 인구 밀도가 높아 식량의 상당 부분을 외부에 의존하던 섬은 봉쇄가 길어지면서 급속히 소진되었고, 보급이 완전히 끊긴 뒤인 1951년 2월 5일 청광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달 뒤인 3월 30일에 임시수도 백춘까지 함락당하면서 4월 1일 남측에 무조건 항복하게 된다.
상륙 이후 소탕 과정에서 대한민국군과 미군, 우익 단체에 의해 동안인 민간인 추산 93만 명이 학살되었으며, 수백만 명이 해로로 한반도와 일본으로 피란하였다. 이 기억은 이후 20년간 동안인의 대한민국관을 규정하였고, 반환 논의 당시 동안자치정부 내 반대 여론의 가장 큰 근거가 되었다.
독립의 무산
동안도가 전후 독립하지 못한 데에는 두 가지 사유가 겹쳐 있었다.
첫째는 승계 주체의 부재였다. 동안 제국의 황통은 동안일치시기 중에 이미 단절되어, 마지막 황제가 후사 없이 사망한 뒤 잔여 황족은 일본 화족(華族)에 편입되어 국적상 일본인이 되었다. 따라서 1945년 종전 시점에 구 동안국의 법통을 주장하며 복벽하거나 망명정부를 자처할 수 있는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해당하는 조직이 없었던 셈으로, 이는 이후 동안의 지위 논의가 전적으로 강대국 간 협의에 맡겨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는 전쟁 참여로 인한 청구권 상실이었다. 연합국은 종전 직후만 하더라도 동안의 독립을 상정하고 있었고, 카이로 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에 준하여 '적절한 시기에' 독립을 부여한다는 취지가 관련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승계 주체가 없다는 점 때문에 구체적인 이행 절차는 끝내 확정되지 못했고, 관리국 지정과 준비 기간을 둘러싼 미소 간 이견으로 논의는 표류하였다. 그 사이 1948년 수립된 동안인민공화국이 사실상 유일하게 동안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체가 되었으나, 이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UN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1950년 이 정부가 침략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고 1951년 무조건 항복하면서, 독립 청구를 제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주체가 교전 패전국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UN은 이를 근거로 동안의 독립 청구권이 소멸한 것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대해 동안인 측은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해 왔다. 한국인 역시 일본 신민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그 사실이 한국의 독립을 가로막지는 않았으며, 승인받지 못한 정부의 행위를 이유로 주민 전체의 자결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은 1971년 반환 논의 당시 독립파의 핵심 근거가 되었으나, 이미 1953년 UN 총회 결의로 대한민국의 잠재주권이 확인된 뒤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을 갖지 못했다.
미국의 시정권 행사
1951년 초 동안인민공화국이 임시수도 백춘 함락 이후 사실상 붕괴하고 주요 행정 기능이 마비되자, UN군은 해당 지역의 안정화와 피난민 보호, 전쟁 후 정전 협정 이행을 위한 군사적 안전지대 확보를 이유로 동안도 일대에 잠정 행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같은 해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3조에서 일본이 병합하였던 동안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모든 권리·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규정하였다. 다만 한국에 관한 제2조가 독립의 승인을 명시한 것과 달리, 동안에 관한 제3조는 그 귀속을 명시하지 않고 추후 UN의 결정에 따르도록 유보하였는데, 이는 상술한 승계 주체의 부재와 동안인민공화국의 교전국 지위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에 따른 지위 확정은 유엔한국위원단(UNCURK)과 정전협정 준비를 담당하던 UN 측 대표단에 의해 검토되었으며, 1953년 12월 4일 UN 총회에서 「동안도 지역의 질서 회복과 시정에 관한 결의」가 가결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 결의는 동안도와 그 부속도서에 대한 대한민국의 잠재주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전쟁 피해 복구 및 치안 안정을 위해 그 시정권을 잠정적으로 미국에 위임한다고 정했다. 소련의 거부권을 피하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닌 총회 결의의 형식을 취한 것이 특징이며, 같은 이유로 헌장 12장의 신탁통치 제도는 원용되지 않았다.
미국 측은 소련, 북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서 동안도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호의적이었고, 전쟁 후 행정력과 재정이 부족했음에도 동안도내 치안 공백의 해결과 잔존 공산세력 소탕이 필요했던 대한민국 또한 미합중국을 관리국으로 요청하면서 미합중국이 시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1954년 한국 정부와의 별도 양해각서를 통해 행정·사법·치안 기능의 상당 부분이 미국 고등판무관에게 이양되었다. 이 체제가 이후의 동안 미국 군정청 및 민정청 체제로 이어지며 약 20년 동안 사실상의 단독 관리 체계를 유지하게 된다.
반환 논의
그러나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닉슨 독트린을 시행하였다. 1천만 명이 넘는 주민의 행정과 복지를 떠안는 민정청 운영은 오키나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정 부담이었고, 미국은 기지 사용권만 확보된다면 행정 비용이 큰 시정권 자체는 넘겨도 무방하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급성장하고 있던 대한민국도 외자 유치의 필요성과 닉슨 쇼크의 극복을 위해 동안도 시정권의 조기 반환을 원했다.
섬 내부의 여론은 갈렸다. 동안자치정부 내에서는 한국의 경제 성장에 편승하려는 반환파와, 시정권 종료를 계기로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파, 미군 주둔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유지하려는 현상유지파가 대립하였다. 독립파는 동안인민공화국의 참전을 이유로 주민의 자결권까지 소멸시킬 수는 없다며 1953년 결의 자체의 재검토를 요구하였으나, 미국과 한국 어느 쪽도 이를 협상 의제로 올리지 않았다. 결국 법적으로 가능한 선택지가 반환과 미국 통치의 연장 두 가지뿐인 상태에서 미국이 예고한 대규모 재정 지원 삭감까지 겹치면서, 1971년 자치정부 의회 표결에서 반환파가 근소한 차이로 우세를 점하였다. 이 표결의 정당성 문제는 훗날 상진동 참사 당시 다시 쟁점이 된다.
경제 발전이 더뎌지면서 정치적 지위가 불안했던 박정희는 동안도의 반환을 좋은 기회로 보고 협상을 서둘렀으며, 1971년 9월 22일 협정이 조인되어 1972년 8월 17일에 발효되었다.
협정의 내용
- 시정권 이양 : 발효일을 기해 동안 미국 민정청이 해체되고, 동안도와 부속도서에 대한 일체의 행정·사법·입법권이 대한민국에 이양된다.
- 미군 기지 존속 : 남동부 해안의 미군 기지는 반환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며, 그 지위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적용을 받는다. 사실상 미국이 시정권을 포기한 대가로 받아낸 핵심 조건이었다.
- 외환 준비금 이관 : 민정청이 통화 관리를 위해 보유하던 달러 준비금 전액이 한국은행으로 이관된다. 1천만이 넘는 인구의 통화를 뒷받침하던 규모였던 만큼 이 조항 하나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고는 단숨에 배가되었고, 닉슨 쇼크 극복의 실질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 통화 전환 : 유통 중이던 달러를 발효일로부터 90일 이내에 원으로 교환한다. 교환은 고정환율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원화 약세와 높은 인플레이션 탓에 섬 주민들의 예금 자산이 실질적으로 크게 감가되었으며 이는 반환 직후 최대의 불만 요인이 되었다.
- 경제협력 : 미국은 민정청 명의로 집행하던 개발 원조를 5년간 차관 형태로 승계 지원하고, 대미 수출 쿼터에서 대한민국에 우대 조치를 적용한다.
- 국적 및 참정권 : 동안도 주민에게는 발효일부로 대한민국 국적이 일괄 부여된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에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동안자치정부는 그대로 해산되었고,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던 자치정부 수반직은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동안청장으로 대체되었다. 한편 이 조항은 유권자의 3분의 1가량이 하루아침에 늘어남을 뜻했으며, 그 표심을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 두 달 뒤 10월 유신이 선포된 배경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 재산권 : 민정청이 보유하던 공유재산은 대한민국 정부가 승계하며, 기지 부지의 토지 소유권 및 임대료 지급 관계 또한 한국 정부가 인수한다.
- 동안청 설치 : 반환 업무와 개발 사업을 전담하기 위해 내무부 산하에 동안청을 설치한다. 일본의 오키나와개발청을 참고한 조직으로, 한시 기구로 출범하였으나 이후 상설화되었다.
